소소한 일상

젊은 날의 초상 (구랑리 간이역)

산내들.. 2007. 11. 29. 12:50

 

 

 

 

'구랑리 간이역'

 

 

구랑리 간이역은 젊은 날의 애환을 간직한 저잣거리다.
예전에는 대도시 유학 말고는 유일하게 점촌에 하나있는 문고에서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구랑리 간이역이 선택의 여지없이 통학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신기, 돌다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띠실이나 목고개 사람들까지 그 곳으로 다녔다.
특히 요즘같이 해가 짧은 겨울시즌이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여 6시에 출발해야 7시에 구랑리역에서 열차를 탈 수 있기때문에
어린 것들이 부지런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
첫차를 놓치면 10시30분에 다음 열차가 있지만 학교 도착하는 시간이 12시 가까이 되기 때문에
웬만히 학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지 않고서야 그 차를 이용할리가 없을 것이다.
그당시는 집집마다 시계가 없었고 어머니의 배곱 시계나 이웃 친구의 부름이 시계를 대신했다.
어두울때 집을 나서면 구랑리 도착 할 무렵에 동이트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별을 보며 집을 나서고 별을 보며 집에 돌아오는 별과 같은 고교시절이었다.

 

 

열차는 철교(산솟골입구 철교)나 산 모퉁이를 돌때는 항상 위험 신호로 기적을 울린다.
돌다리와 구랑리 사이 협곡인 지금의 칼국시 집 부근에는 독가촌 꼽싸집이 있었는데
그 부근에서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열차를 탈 수 있고
돌다리쯤에서 기적소리를 들으면 당연히 열차를 놓치고 만다.
기적소리를 듣고 꼽싸네 집에서 부터 질러(샛길)가는 논길로 100m 달리기를 하면
구랑리역에서 약 2분간 정차한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며 산모퉁이에 고개를 내밀고
우리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움직이는 열차의 계단 난간을 잡고 오른다.
달리기를 못하거나 숨에겨워 중간에 주저 앉으면 그날은 학교 꾸먹는(빼치기) 날이다.

 

 

열차 뒷 모습을 아쉽게 바라본 뒤에 구랑리나 작은 돌다리 등에서 막걸리 한잔하고
철교 밑이나 산 속에 쳐박혀 있으면 왜 그리도 하루가 지루한지.
사람들 눈을 피해 산속에 숨어서 까먹는 도시락은 학교에서 먹는 것 보다 열배는 더 맛있다.
그래도 막차(통학열차)에서 내린 친구들과 슬그머니 합류하여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장한아들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다고
봉두밥에 마성 5일장에서 곡식과 바꿔온 간고등어도 구워서 주신다.
그러나 말거나 구랑리 냇가와 야산에서 하루를 보내느라 배가 고프니 잘도 먹는다.
얼른 한 그릇 뚝딱하고 누룽지 한 그릇 덤으로 먹고나면
어머니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듯 쳐다 보신다.
학교에 가지않고 구랑리에서 놀다가 온 사연을 알리없기 때문이다.

 

 

 

 

 

 

 

 

어느 가을날이다.
학교 가을소풍을 가는 날에
우리(종진, 석모, 효식)는 구랑리역으로 가다가 황티기 고개에서
그 당시 중학(점중통학)생인 호야를 꾀어내어
서디 박이장님 과수원 산 기슭을 기어서 올라 갔던
그때 순진한 호야는 동네 형들에게 붙잡혀 학교도 못가고
백화산에서 도시락 까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누구는? 손가락이 항상 담배 니코틴이 베어 누렇게 변해 있었는데
어느 날 영어 선생님께서 그 손가락을 보시더니 하시는 말씀
"이눔은 콩 서리를 많이 해먹어서 손이 누렇구나!!!.."
잘 아시면서 돌려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정겨운 모습이 생각난다.

 

 

수년 뒤에 사촌?이 충주비료회사 입사시 고교 학생부기록을 열람했는데
성적은 둘째치고라도 무단 결석이 수 십여일로 기록되어 있어
이름이 비슷한 내 것을 제출할까 싶어 한번 떼어봤더니
그 역시 절반 정도라 어이없어 탄식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구랑리 간이역!!!..
그 곳은 젊은 학창시절의 애환이 듬뿍 스며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가장 순수했던 젊은 날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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