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나들이

토목 건축의 백미 수원화성

산내들.. 2015. 6. 23. 11:44

예술성이 돋보이는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다.
개혁적인 통치자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수원 화성은 자연을 이용한 통치 이념이 반영된 것은 물론이고 예술성과 과학, 경제까지 생각하고 건설되었다.
자연환경을 적절히 이용한 것은 물론, 설계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었지요. 수원 화성은 예술성도 뛰어나다.
웅장한 문과 포루, 공심돈 등의 건축물은 군사 시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장안문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 해향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북서적대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북포루

 

북포루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보 5척의 거리에 있다.
치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 위에 있다.
성서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화서문(보물 제403호)

 

화서문[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 유향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146보쯤 되는 거리의 산 위의 휘어 굽은 곳에 있다.
5량 4간으로 동서가 18척, 남북 22척, 동북 3간은 모두 판자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였고 외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리고, 그 서남 한 간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다.

 

 

 

 

 

 

 

 

 

 

 

 

 

 

 

 

 

 

 

 

 

 

 

 

 

 

 

 

 

서암문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44보 되는 곳, 즉 팔달산 남쪽 기슭 사이에 있다.
성을 쌓은 것이 꺽이어져 있어 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지 모른다.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곳의 제도와 같다.
문은 산의 허리에 있고 길은 성 위로 났기 때문에 문 안의 체석은 저절로 네모난 구덩이가 되었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 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게 하였다.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 묘향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성의 완급과 사벽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고 위에 층각을 세웠다.
밑에는 판자를 깔고, 연잎 평난간으로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합을 드리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 화성장대로 편액을 붙였다.

 

 

 

 

 

 

 

 

 

 

 

 

 

서노대

 

서노대는 장대의 뒤에 있는데, 무비지에 이르기를, 노대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되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으니,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효원의 종

 

 

 

 

 

 

 

 

 

 

 

 

 

 

 

 

 

서남암문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고도 하는데, 용도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있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이다.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 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된다.

 

 

 

 

 

 

 

 

 

 

 

 

 

 

 

 

 

 

 

 

 

 

 

 

 

팔달문(보물 제402호)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남수문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봉돈

 

봉돈은 일자문성의 위에, 동2포와 동2치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드디어 철성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창룡문

 

창룡문[편액은 판부사 유언호가 썼다]은 성의 동문이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유좌 묘향이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에 있는 계평돈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연무대(동장대)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라고도 부르며 화성 시설물 중 가장 위용이 있는 건물로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장대이다.
지붕형태는 팔작지붕이며 동장대 뒤에는 기와를 이용해 영롱담을 쌓았다.

 

 

 

 

 

 

 

 

 

 

 

 

 

 

 

 

 

동북포루

 

동북포루는 각건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화홍문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 유한지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 언덕을 대천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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